또 기다리는 편지 / 정호승
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
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.
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
잠든 세상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
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
저무는 섬 하나 떠 올리며 울었습니다.
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
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
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
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
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.
눈꽃 / 玄房 현영길
눈꽃
예쁜 나뭇가지
지붕 위 곱게 핀 너
바람 불면 어느새
얼굴 뺨에 인사하고
쉽게 사라진다.
새벽 첫 버스 길
기우뚱하는 차선 길
넌, 어느새 머리
둥지 뜬다.
시작 노트: 첫눈이 내리는
발걸음이 무겁게 싸인 너 신발이
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
너무 많은 눈 이유일까?
이 세상 주관하시는 임의 흰 꽃
이 땅에 내린다. 겨울 알리듯
눈꽃 예쁘게 치장한다.
세월이 멈추다 / 박영춘
보고파 보고파서
그리워 그리워서
맨 날 맨 날
만날 날만
기다리다보니
세월은
자꾸 길어만 집니다
보고픔
그리움
빠른 세월의 약입니다
보고프면
한 잔 술로 지우고
그리우면
두 잔 술로 달래다보니
약속의 날은
더디게
느리게 다가와
서로 만나
그대
내 그리움 품어 안아
나
그대 보고픔 품어 안아
그리움 보고픔
보따리 터뜨려 섞다보니
놓기 싫어 놓치기 싫어
세월은 순간
감도 옴도 품어 안아
세월이 잠시 멈춥니다
겨울길을 간다 / 이해인
겨울길을 간다
봄 여름 데리고
호화롭던 숲
가을과 함께
서서히 옷을 벗으면
텅 빈 해질녘에
겨울이 오는 소리
문득 창을 열면
흰 눈 덮인 오솔길
어둠은 더욱 깊고
아는 이 하나 없다
별 없는 겨울 숲을
혼자서 가니
먼 길에 목마른
가난의 행복
고운 별 하나
가슴에 묻고
겨울 숲길을 간다
당신께 쓴 편지 / 논길 구영송
비오는 날
눈오는 날
소망 하나 걸어
눈썹 하얀 밤보내고
한장의 종이를 다 채우지 못한
몇 줄
맑은 새벽 공기 담아 보낸다
안녕, 잘 받았다 두문장이 돌아왔다
눈, 입술, 가슴이 웃는다
그 속엔
해, 달, 꽃, 새, 나무 ,구름
다 들어있다
잊으시구려 / 피천득
잊으시구려
꽃이 잊혀지는 것 같이
한때 금빛으로 노래하던
불길이 잊혀지듯이
영원히 영원히 잊으시구려
시간은 친절한 친구
그는 우리를 늙게 합니다.
누가 묻거든 잊었다고
예전에 예전에 잊었다고.
꽃과 같이 불과 같이
오래 전에 잊혀진
눈 위의 고요한 발자국 같이
詩詩 하다가
- 시 : 돌샘/이길옥 -
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
아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다.
아는 게 병이라는 말 맞다.
웬만한 것은 성에 차지 않는다.
귀에 거슬리고
눈에 들지 않는다.
생각을 벗어나고
마음에 맞지 않는다.
모든 일에 비위 거스르는 것뿐이라
너무 가소롭고 시시하다.
시시하니까
詩詩 하다가
詩 앞에 무릎 꿇고 빈다.
아는 게 많아도
너무 많이 알아도
詩 앞에서는 안 통한다.
겨울 아가 / 이해인
눈보라 속에서 기침하는
벙어리 겨울나무처럼
그대를 사랑하리라
밖으로는 눈꽃을
안으로는 뜨거운 지혜의 꽃 피우며
기다림의 긴 추위를 이겨 내리라
비록 어느 날
눈사태에 쓰러져
하얀 피 흘리는
무명(無名)의 순교자가 될지라도
후회 없는 사랑의 아픔
연약한 나의 두 팔로
힘껏 받아 안으리라
모든 잎새의 무게를 내려 놓고
하얀 뼈 마디 마디 봄을 키우는
겨울나무여
나도 언젠가는
끝없는 그리움의 무게를
땅 위에 내려 놓고 떠나리라
노래하며 노래하며
순백(純白)의 눈사람으로
그대가 나를 기다리는
순백의 나라로